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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마           조회수 3,153
2005.01.06 22:20


"한국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파리채“
<까탈이가 만난 사람> 인도에서 한국식당 하는 빼마와 잠양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김남희(freesoul)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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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 북부의 작은 마을 맥그로드 간즈의 모습.

ⓒ2004 김남희
빼마와 잠양을 만난 곳은 인도 북부의 작은 마을 맥그로드 간즈에서였다. 우리에게는 달라이 라마가 이끄는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는 다람살라로 더 알려진 곳이다. 마을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 삼십 분이면 걸을 수 있는 그 작은 마을에 한국식당이 두 개나 있었고, 그 중 하나가 카페 ‘리’(티베트어로 산이라는 뜻)였다. 티베트 남자 잠양(29세)과 결혼한 한국 여자 빼마(티베트어로 연꽃이라는 뜻. 한국이름은 남현주. 28세)가 꾸려가는 테이블 4개의 작은 식당.

처음에는 오랜만에 한국 음식도 맛보고, 식당 한 켠에 꽂혀있는 한국책을 읽기 위해 드나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안경 너머로 작은 눈을 반짝이며 웃는 그녀, 빼마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궁금했다. 어떻게 한국 여자가 티베트 남자와 결혼해 이곳까지 와서 살고 있을까?

그곳에 머무는 18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식당으로 출근해 가게문을 닫고 함께 퇴근하기를 반복하며 조금씩 그들 부부의 삶과 꿈을 들여다보았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빼마는 대부분의 대학생이 그렇듯 전공공부보다는 다른 일에 빠져 살았다. 독실한 카톨릭 집안에서 자란 그녀는 수녀가 되어 장애아와 노인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치매노인들을 위한 공동체에서 6개월씩 거주하며 일하기도 했고, 대학 시절 내내 장애아를 위한 공부방 활동을 해왔다. 그녀가 남편 잠양을 만난 건 다니던 대학을 중퇴하고 인도로 유학 왔을 때였다. 사랑에 빠진 그들은 서로 다른 문화와 언어의 벽을 넘어 결혼에 이르렀고, 결혼 후 한국에서 1년 8개월을 살다가 인도로 돌아왔다.

잠양의 아버지는 티베트에서 대대로 무역업을 하며 많은 재산을 모은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국군에 의해 부모와 누이, 형제들이 눈앞에서 총살당하는 모습을 봐야만 했다. 그리고 자신도 감옥에 끌려갔다. 죽을 날을 기다리며 감옥에 갇혀있던 아버지를 구한 건 잠양의 어머니였다. 간수를 매수해 남편을 빼낸 후 둘이서 함께 티베트를 탈출했다.

가족이 죽는 모습을 눈앞에서 봐야했던 충격으로 아버지는 두 번이나 뇌수술을 받아야 했고, 그 수술비와 병원비를 마련하느라 많은 빚을 져야만 했다. 잠양의 어머니는 그 당시 아버지 병간호를 하고, 술을 만들어 식당에 팔고, 집안일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느라 하루에 두 시간 이상 잠을 자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의 잠양은 반에서 공부를 제일 잘 하는 아이였지만, 열여섯 나이에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을 시작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짐을 나르고 하루 60루피를 버는 포터로 시작했다. 열일곱 살부터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한 그는 8년 간 약에 중독돼 살았다. 온갖 종류의 약을 다 섭렵하는 동안 하루에 스무 알의 환각제를 털어 넣기도 했고, 팔에는 더 이상 주사바늘을 찌를 곳이 없어 허벅지나 무릎에 찔러대기도 하는 자학적인 삶의 연속이었다.

산다는 일에서 아무런 의미와 희망을 찾을 수 없는 날들이었다. 무엇보다 그 모든 고통의 원인이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가 아니라 강제적인 환경(나라 없는 설움)에서 기인했다는 것이 그를 절망하게 했다. 그런 그를 변화시킨 건 산이었다. 때로는 말 없는 자연이 사람보다 더 큰 가르침을 주기도 한다. 인생은 낭비하기 위해 있는 게 아니라 살기 위해서 있는 거라는 것을 그는 산에서 배웠다.

스스로 변화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겐 누군가 나타나 길을 열어준다. 잠양에게도 그런 만남이 찾아왔다. 어느 날 이 작은 마을에 나타난 한 서양인. 그는 폐지를 재활용해 앨범과 공책을 만드는 기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잠양은 그에게 찾아간 최초의 학생 중의 하나였다. 열심히 기술을 배워 여름엔 트레킹 가이드, 겨울엔 공책을 만들어 팔면서 재활을 꿈꾸고 약을 끊었다. 그리고 빼마를 만나 결혼을 하고 한국에서 사는 경험을 하게 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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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소의 창에서 바라보는 앞산 모습. 맥그로드 간즈.

ⓒ2004 김남희

"한국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파리채“

“잠양, 한국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게 뭐였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답이 이어진다. “파리채요.” “뭐? 파리채? 아니, 파리채가 왜?” 파리채와 파리 잡는 도구인 끈끈이를 본 잠양은 그야말로 경악했다. 어떻게 생명을 죽이기 위한 도구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게다가 끈끈이에 붙어 몸부림치면서 죽어가게 하는 끔찍한 방법을 고안할 수 있는지 너무도 충격적이었다고 한다.

“누가 누나를 끈끈이에 붙여놓고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본다면 어떻겠어요? 너무 끔찍한 일 아니에요?”

이 말을 듣는 순간, 내 생명과 파리의 생명을 동등 비교하는 잠양이 어이없이 다가온다.
“하지만 잠양, 파리는 더러우니까 죽이는 거야. 인간에게 질병을 옮기잖아.”
“그럼 파리가 꼬이는 더러운 환경을 안 만들도록 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또 파리가 더러우면 얼마나 더러운데요?”

옆에서 듣던 빼마가 끼어든다.
“잠양은 방에 벌레나 모기가 들어오면 꼭 문을 열어서 내보내요. 시간도 오래 걸리고, 먼지가 들어오기도 하는데, 절대로 죽이지 않고 나갈 때까지 기다린다니까요.”

두 사람이 연애 할 때의 일이다. 빼마가 잠양과 그의 티베트인 친구를 만나 카페에서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눈앞에서 모기가 윙윙거리기에 손바닥으로 탁 쳐서 죽였는데, 둘이 동시에 기겁을 하며 소리를 지르더란다.

“No mercy!(자비심도 없어!)"
모기가 널 죽이기라도 하냐고, 어떻게 때려죽일 수 있느냐고 되묻던 두 사람을 보며 빼마는 자라온 문화의 차이를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화적 차이로 인한 충격은 계속 이어졌다. 역시 한국에서 살 때의 일이다. 처갓집 식구들과 함께 대포항에 갔다. 살아있는 물고기를 이것, 저것하며 골라서 그 자리에서 회를 뜨는 모습을 보고 심한 충격을 받은 잠양.

“티베트 사람도 물론 고기를 먹긴 해요. 척박한 환경에서 고기를 먹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어려우니까. 하지만 고기를 먹는 것 자체가 죄인데 어떻게 살아있는 걸 골라서 죽인 후에 바로 먹을 수가 있는지 이해가 안가더라고요.”

티베트인들은 어려서부터 파리나 모기, 물고기의 생명이 인간의 생명과 똑같은 가치를 갖는다고 배운다. 사람에게 할 수 없는 일, 해서는 안 되는 일은 동물과 곤충에게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배워온 잠양. 이 지구상에서 인간이 가장 우월한 종족이고,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살상도 합리화될 수 있다고 배워온 나. 그 사이의 간격은 파리와 인간의 생물학적 차이 만큼이나 아득하게 멀다.

음식이나 살생에 관한 견해 차이는 어쩌면 사소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후 직장을 잡고 일을 하는 동안 더 큰 충격을 감수해야 했으니. 한국에서 잠양의 첫 직장은 가구공장이었다. 카자흐스탄 사람들과 한국 사람들이 같이 일하던 그곳에서는 힘든 일이나 야근은 온통 외국인 차지였다. 그곳에서 3년을 근무한 카자흐스탄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힘든 일과 온갖 잡무를 도맡아 하며 월 70만원의 급여를 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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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빼마와 잠양과 펩시. 카페 리 앞에서.

ⓒ2004 김남희

반면에 일을 시작한 지 6개월 된 한국 여성은 매달 110만원을 받으면서도 쉬운 일만을 골라서 했다. 게다가 독실한 이슬람신자이자 기혼여성인 그녀는 한 한국인 남자직원의 성희롱과 노골적인 유혹을 늘 참아야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잠양이 말했다.

“무조건 참기만 해서 병 만들지 마세요. 사장에게 당당하게 월급 올려달라고 요구하고, 같이 여관 가자는 남자는 따귀라도 때리고, 계속 힘든 일시키면 공장 옮기세요. 아줌마도 돈이 필요해서 일하는 것처럼 사장도 일꾼이 필요하고, 이곳에선 아줌마도 필요한 존재 아니에요? 서로 필요해서 같이 일하는데 왜 아줌마는 비굴하게 굽실거려야 하고, 한 사람은 하인 부리듯이 해야 하는 거죠?”

약속과 다르게 계속되는 야근과 부당한 대우에 항의하는 잠양의 모습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조금씩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어느 날 추석 연휴를 마치고 출근준비를 하는 잠양에게 사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잠양씨는 우리와 안 맞는 것 같다”라며 정중히 해고.

결국 한 달 만에 가구공장에서 잘린 뒤 잠양이 두 번째로 찾은 곳은 자동차 수리업소. 일명 카센터. 그 곳에서 만난 한국 사람들도 잠양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데는 실패했다. 차를 수리하러 온 손님들 대부분은 잠양을 보자마자 반말로 묻고는 했다.
“어, 외국 사람이네. 어디서 왔어? 그래, 돈 많이 벌었어?”
이름이나 나이, 한국에서 살기는 불편하지 않은지, 이런 것들을 묻기 전에 돈 많이 벌었냐고 물을 수 있는 것 자체가 잠양에게는 놀라움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삶의 중심에 놓이는 것은 결국 돈이라는 것을 잠양은 그때 깨달은 것이다. 결국 이런 질문에 익숙해진 잠양은 나중엔 이렇게 대답했다.
“3억 벌었어요. 매일 라면만 먹고 일했거든요.”
결국 이곳도 20일 만에 사직.

세 번째는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신문배달을 시작했다. 신문배달은 여러 면에서 그에게 잘 맞았다. 혼자 오토바이를 몰면서, 사람들한테 상처받는 일 없이, 해 뜨는 모습을 보면서 일할 수 있어서 좋았다. 남 밑에서 일하는 것도 싫고, 남을 부리면서 일하는 것도 싫어하는 그의 성격에도 잘 맞았고. 그러던 어느 날 배달을 마치고 돌아와 TV 드라마를 보던 중이었다. 몰락한 집안의 장남이 동생들 몰래 신문배달을 하다가 들켰는데, 동생들이 울면서 “형이 어떻게 신문배달 따위를 할 수 있어?”라며 매달리더란다. 그 장면에 또 충격.
“너무 어이가 없었어요. 이 드라마 나쁜 드라마니까 보면 안 된다고 빼마한테 그랬어요.”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누군가의 가방이 열려 있으면 반드시 다가가서 알려주는 잠양. 외국인이 불명확한 한국어발음으로 그런 말을 하니 한국인은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보게 되고, 남편이 그런 취급을 받는 게 싫어 빼마는 늘 말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잠양은 “만약 내가 말을 안 해줘서 그 아주머니가 지갑을 잃어버리면 그건 내 죄야”라며 절대로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아이들이 동물을 괴롭히거나 서로 싸워 말릴 때면 잠양은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건 죄야”라고. “그러면 엄마한테 혼난다”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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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술비 견적 80만원으로 잠양과 빼마를 곤경에 빠트렸던 강아지 펩시.

ⓒ2004 김남희
어느 날 제임스가 동네 하수구 앞에 버려진 더럽고 꾀죄죄한 강아지 한 마리를 안고 들어왔다. 불쌍해서 데리고 왔다면서. 그렇게 주워온 강아지가 어느새 세 마리. 문제는 두 번째 강아지였다. 한 농장에 묶인 채 버려져 있던 푸들이었는데 병원에 데리고 가니 각종 병 치료 및 수술비 견적이 80만원(백내장, 귀의 염증 두 군데, 목뼈 기형 등)이었다. 빼마는 그 강아지를 끌어안고 울면서도 속으로는 ‘도로 갖다 놔야지’라고 생각했다.

“얘 불쌍해서 어떡해?”
울먹이는 빼마에게 잠양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뭘 어떡해? 치료해야지.”
두 사람이 버는 돈을 다 합해도 월수입 100만원이 안 되던 때였다. 어이없어 하는 빼마에게 잠양이 한 말.
“네가 이 강아지를 버리면 얜 두 번 버림받는 거잖아. 그럼 이 강아지를 버린 사람과 네가 다른 게 뭔데?”
결국 일주일에 한 번씩 병원에 데리고 다니면서 치료비로 50만원 가까이 쓴 후에야 동물보호협회와 연결되어 무료치료를 받게 되었다.

잠양은 한국에서 자본주의가 뭔지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우리가 그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게 고작 자본주의가 뭔지 정도뿐이라니….

“잠양, 다른 깨달음은 없었어?”
부끄러움을 숨기며 묻는 내게 잠양이 대답한다.
“아, 빼마의 어머니요! 장모님께 정말 많은 것을 배웠어요.”
언제나 남을 위한 봉사를 생활의 일부로 실천하며 살아온 빼마의 어머니를 보며 그는 깨달았다. 어머니의 품이 얼마나 넓은지, 남에게 베푼다는 것이 뭔지, 끝없이 받아들여주는 존재가 어머니라는 것을. 그래서 장모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어머니가 좋아하는 노래들을 열심히 연습했다. 잠양이 날마다 나에게 불러주는 “사랑은 얄미운 나비인가 봐”, “자옥아”, “댄서의 순정”(그는 가사도 안 틀리고 3절까지 다 부른다)같은 노래는 그때 연습한 곡들이다.

한국을 떠나 이곳 맥그로드 간즈에 정착한 후에도 두 사람이 살아온 환경의 차이는 크고 작은 문제를 만들곤 했다. 카페를 열 때의 일이다. 돈이 부족했던 두 사람은 구조 변경에서 실내 디자인, 페인트칠까지 모든 일을 직접 해냈다. 빼마가 지금도 눈물을 글썽이며 이야기하는 사건은 페인트 상회에 페인트를 주문했을 때 일어났다.

판매 책자에 나온 붉은 색을 주문했으나 점원은 끝내 그 붉은 색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자신이 만든 분홍색을 붉은 색이라고 우기기만 할 뿐이었다. 페인트 가격은 700루피였다(점원의 한 달 급여의 절반 정도 된다). 빼마는 이 페인트를 사주는 것은 결코 점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 페인트를 사준다면 그가 계속 이런 식으로 일을 하게 만드는 거라고 생각했고,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뻔뻔스럽게 우기기만 하는 태도를 용납할 수 없었다.

잠양의 생각은 달랐다. 만약 이 페인트를 못 사겠다고 하면 당연히 인도인 주인은 점원 월급에서 700루피를 제할 텐데, 이 사람의 월급이 전 가족의 유일한 생활비라면? 그렇게 남에게 상처와 아픔을 주면서까지 이 색을 고집할 이유가 있는가? 그 분홍색 페인트를 사오면서 잠양은 가게 점원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이 색을 그냥 사지만 다음에도 이런 식으로 하면 절대로 사지 않겠다”고.

‘내 돈 내고 페인트 하나 제대로 못 사나’ 싶어 빼마는 페인트를 사들고 오면서 엉엉 울었다. 우는 빼마를 달래며 잠양이 말했다. “너는 내가 달래줄 수 있지만, 만약 그 사람의 어깨에 가족들의 생계가 달려있는데, 우리가 안 산 페인트 때문에 생계가 위협된다면, 그 사람은 누가 위로해 주겠니?”

또 이런 일도 있다. 잠양에게 자주 돈을 받아가는 거지 할아버지가 있다. 빼마는 무조건 돈을 주는 건 의미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그를 말리지만 잠양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 돈으로 할아버지의 삶을 구원할 수는 없다는 걸 알아. 하지만 할아버지는 지금 당장 배가 고프고, 밥 먹을 돈이 필요한데 그걸 외면해야 돼? 난 그저 할아버지에게 지금 필요한 것, 내가 줄 수 있는 걸 드리는 거야. 그리고 그 할아버지 나한테 매일 오는 것도 아니야.”

"티베트 노인들 위한 공동체 만드는 게 꿈“

누구에게나 그렇듯 두 사람에게도 꿈이 있다. 빼마와 잠양의 꿈은 이곳에 티베트 노인들을 위한 건강하고 밝은 분위기의 공동체를 만드는 거다. 잠양은 부모님이 ‘이제 네가 다 컸으니 우리는 죽어도 좋다’라는 말을 할 때가 가장 싫다고 한다. 아무 할 일도 없이 무기력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들의 모습이 가슴 아파 노인들을 위한 공동체를 생각하게 되었다.

“잠양, 한국에서 돈 벌어서 시작하는 게 쉽지 않아? 여기서 밥 팔아서 버는 돈보다 훨씬 많이 벌잖아?”
“그러기 싫었어요. 누나, 만약 제가 한국에서 돈을 벌어 와서 공동체를 꾸렸다면 여기 젊은 애들이 그랬을 거예요. 쟨 외국여자랑 결혼했으니까 저런 일을 할 수 있는 거라고. 그런 인상을 주기 싫어요. 누구나 꿈이 있다면, 이곳에서도 열심히 일을 해 그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누나, 전 달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해는 세상을 밝게 비춰주지만 우린 태양을 바로 바라볼 수도 없고, 그 아래 오래 있을 수도 없잖아요? 하지만 달은 태양처럼 환하지는 않지만 오래 바라볼 수 있고, 달빛 아래 종일 머물 수도 있어요. 전 그런 달빛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꿈을 향해 걸어가는 젊은 부부의 발걸음은 느리고, 조심스럽다. 어쩌면 길이 굽어 오랫동안 에돌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 먼 길을 걸어 꿈의 문을 여는 날, 맥그로드 간즈에 크고 환한 달 하나 둥실 떠오를 것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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