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서부공정' 현장 신장·티베트 박물관 가보니
karu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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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27 18:36
[세계일보] 2007년 02월 26일(월) 오후 08:40
“신장(新疆), 티베트는 자고 이래 위대한 조국(중국)의 불가분의 영토다.”신장 티베트 등 중국
변경지역의 박물관이 ‘역사적인 유물과 학술 자료를 수집·전시·보존한다’는 박물관 본래 목적에서 벗어나 ‘중화제국’의 정치선전장으로 변질되고
있다. 독립 의지가 강한 이 지역 소수민족에게 ‘한족(漢族)과 55개 소수민족은 한 가족’이라는 ‘중화민족’의 이데올로기를 이식하려는
‘서부공정’이 이어지고 있다.◆신장박물관=신장위구르자치구 수도인 우루무치시에 위치한 신장박물관. 선사시대 전시관을 지나 역사시대 전시관에
들어서면 맞닥뜨리는 표어가 있다. ‘자고 이래 신장은 중국의 불가분의 영토.’

선사시대관, 신장민족 풍정(風情)관 등 4개 전시관 중 가장 넓은 1500㎡를 차지한 역사시대 전시관에 진열된 문헌, 도편 등 100여점의 유물은 표어대로 한결같이 ‘왜 신장이 중국영토인지’를 증명하기 위한 것뿐이다.
예를 들면 ‘기원전 59년 한조(漢朝)가 서역도호부를 설치했다’는 중국 측 역사서의 한 쪽을 전시하면서 “한조가 서역도호를 임명한 이래로 신장은 위대한 조국의 불가분의 구성 부분이 됐다”고 주장하는 식이다.
역사적 실체도 불분명한 한사군의 설치를 내세우며 한강 이북은 모두 중국 땅이었다고 주장하는 중국의 전통적인 역사왜곡 방식과 일맥상통한다.
헤이룽장(黑龍江)성 닝안(寧安)시 발해진(鎭)의 박물관에도 같은 수법이 사용되고 있다. 당(唐)이 발해에 관직을 내렸다는 기록이 적힌 구당서의 한 쪽을 전시하며 발해가 중국의 지방정권임을 선전하고 있다.
신장의 주류인 위구르족은 옛날의 돌궐족으로 알려져 있다. 1884년 청(淸) 건륭제가 새로운(新) 영토(疆)라는 뜻을 담아 ‘신장’이라는 지명을 붙인 데서 알 수 있듯이 신장은 말 그대로 근대에 와서야 중국 영역에 편입됐다.
하지만 박물관 측은 한조의 서역도호부, 당조의 안서도호부, 청조의 만주 팔기군 파견 등을 설명하는 자료만 전시하면서 위구르족의 역사는 한 줄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당연히 박물관에 대한 위구르족의 시각이 고울 리 없다. 박물관으로 안내한 택시기사는 “신장박물관은 우리(위구르족)의 것이 아니라 그들(한족)의 것”이라며 “한족이나 한국인 일본인 등 외국 관광객이 주로 신장박물관을 찾지만 위구르족은 잘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티베트박물관=은둔의 땅 티베트는 모험과 낭만을 꿈꾸는 이방인에겐 동경의 대상이다. 그래서 시짱(西藏)자치구의 수도 라싸에 오는 외국 관광객은 대개 티베트박물관을 먼저 찾는다. 티베트의 역사와 전통을 자세히 알기 위해서다.
하지만 티베트박물관도 ‘중화제국’의 선전장이기는 마찬가지다. 제1관 선사시대를 거쳐 들어가는 제2전시관의 이름 자체가 ‘나눌 수 없는 역사(不可分割的歷史)’다.
이데올로기의 개입이 어려운 선사시대 전시관 다음에는 바로 해당 지역이 ‘중국의 불가분 영토’임을 주장하는 역사시대관을 배치하는 게 중국 변경지역 박물관의 특징이다.

티베트박물관은 신장박물관보다 중국의 영토임을 ‘입증’하는 자료가 더 방대하다. 이곳에는 각종 문헌, 도편 자료와 함께 중국 관리의 관복, 도장, 문서 등이 망라된 300여점의 자료가 전시돼 있다. 자랑스럽게 유물을 바라보는 한족 관광객 옆에서 외국인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설명을 읽는 장면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자료의 진열 방식은 신장박물관과 비슷하다. 티베트에 대한 중국 역대왕조의 정부기관 설치와 관원 파견 사실, 판첸라마(티베트불교의 제2인자) 책봉과 관련된 사료를 집중적으로 배치해 놓고 있다. 기관의 실체 여부와 성격,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는지 여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티베트족의 토번(吐蕃)왕국도 티베트고원을 넘어 중앙아시아까지 넘본 강성한 국가였다. 7세기 송첸감포왕은 당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화해 조건으로 당나라 문성공주를 왕비로 삼기도 했다.
그러나 박물관 측은 당이 패해 문성공주를 내준 사실은 숨기고 “이때(당조)부터 티베트가 당조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원조(元朝)에 조국(중국) 판도에 들어왔다”고 주장한다.
1951년 중국의 티베트 무력 점령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간의 평화협정을 통해 얻은 평화와 자유’로 바뀌었다. 1959년 라싸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의 유혈진압과 인도로 망명한 달라이 라마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다.
우루무치·라싸=김청중 특파원
ck@segye.com
동북공정 최전선 옌볜박물관은…淸末 이후만 전시발해 유물은 全無
발해의 주활동 무대였던 만주의 옌볜(延邊)박물관에서는 찬란한 ‘해동성국’의 문화 유물을 한 점도 볼 수 없다.
지린(吉林)성 옌볜조선족자치주 주도(州都)인 옌지(延吉)시 용동가의 현대식 건물에 자리를 잡은 옌볜박물관. 2001년 중국 100대 국가중점박물관에 선정된 이곳은 건축면적 3만5000㎡, 전시면적 3600㎡로 겉으로 보기엔 비교적 웅장하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전시관은 ‘인민혁명투쟁사관’과 ‘조선민속관’뿐이어서 을씨년스런 기운마저 감돈다. 전시품도 한복, 농기구, 짚신, 각종 사진류 등이어서 다소 허접스럽다.
한족인 옌볜박물관 관계자는 “옌볜박물관에서는 청나라 말 이후의 것만 전시한다”며 “조선족은 1800년대 후반에나 옌볜에 오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한반도 동북부와 만주를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인 옌볜은 발해시대에 역사의 전면에 부상했다. 대조영(大祚榮)이 나라를 세운 동모산은 옌볜주 둔화(敦化)시에 있는 성자산 산성이다.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발해의 세 도읍 가운데 중경(中京·화룽현 서고성), 동경(東京·훈춘시 팔련성)이 모두 옌볜주 관내다. 상경(上京)이 있던 헤이룽장(黑龍江)성 닝안(寧安)시 보하이진(渤海鎭)도 옌볜에서 200㎞ 거리에 있다. 그만큼 발해의 유물 유적이 산재해 있다. 발해 이전 시기의 고구려 성터도 곳곳에 남아 있다.
중국 측 자료에 따르면 옌볜박물관은 발해 관련 유물 900여점을 소장하고 있고, 이 가운데 정효공주 묘비와 벽화 등 1급 보물도 11점이나 된다. 하지만 중국 당국은 발해 유물 공개를 꺼린다. 1960년대부터 발해사를 자국 역사에 편입한 중국 당국은 조선족이 많은 옌볜의 박물관 전시목록에서 발해 유물을 의도적으로 제외한 것으로 보인다. 한·중 간 동북공정 논쟁도 중국 당국의 ‘발해 유물 감추기’에 한몫 하고 있다는 평가다.
옌볜에서 발해 연구를 한 한국인 연구자는 “발해 유물은 옌볜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돼 있는 것으로 안다”며 “외국인이 발해 유물을 보려면 성(省)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그는 “과거 고구려·발해사 연구를 주도했던 옌볜대는 동북공정 여파로 연구에서 소외됐고, 조선족 연구자들은 ‘자의 반 타의 반’ 연구를 포기하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옌지=김청중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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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관, 신장민족 풍정(風情)관 등 4개 전시관 중 가장 넓은 1500㎡를 차지한 역사시대 전시관에 진열된 문헌, 도편 등 100여점의 유물은 표어대로 한결같이 ‘왜 신장이 중국영토인지’를 증명하기 위한 것뿐이다.
예를 들면 ‘기원전 59년 한조(漢朝)가 서역도호부를 설치했다’는 중국 측 역사서의 한 쪽을 전시하면서 “한조가 서역도호를 임명한 이래로 신장은 위대한 조국의 불가분의 구성 부분이 됐다”고 주장하는 식이다.
역사적 실체도 불분명한 한사군의 설치를 내세우며 한강 이북은 모두 중국 땅이었다고 주장하는 중국의 전통적인 역사왜곡 방식과 일맥상통한다.
헤이룽장(黑龍江)성 닝안(寧安)시 발해진(鎭)의 박물관에도 같은 수법이 사용되고 있다. 당(唐)이 발해에 관직을 내렸다는 기록이 적힌 구당서의 한 쪽을 전시하며 발해가 중국의 지방정권임을 선전하고 있다.
신장의 주류인 위구르족은 옛날의 돌궐족으로 알려져 있다. 1884년 청(淸) 건륭제가 새로운(新) 영토(疆)라는 뜻을 담아 ‘신장’이라는 지명을 붙인 데서 알 수 있듯이 신장은 말 그대로 근대에 와서야 중국 영역에 편입됐다.
하지만 박물관 측은 한조의 서역도호부, 당조의 안서도호부, 청조의 만주 팔기군 파견 등을 설명하는 자료만 전시하면서 위구르족의 역사는 한 줄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당연히 박물관에 대한 위구르족의 시각이 고울 리 없다. 박물관으로 안내한 택시기사는 “신장박물관은 우리(위구르족)의 것이 아니라 그들(한족)의 것”이라며 “한족이나 한국인 일본인 등 외국 관광객이 주로 신장박물관을 찾지만 위구르족은 잘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 ◇중국 시짱의 티베트족자치구 수도
라싸에 있는 티베트박물관 전경. |
◆티베트박물관=은둔의 땅 티베트는 모험과 낭만을 꿈꾸는 이방인에겐 동경의 대상이다. 그래서 시짱(西藏)자치구의 수도 라싸에 오는 외국 관광객은 대개 티베트박물관을 먼저 찾는다. 티베트의 역사와 전통을 자세히 알기 위해서다.
하지만 티베트박물관도 ‘중화제국’의 선전장이기는 마찬가지다. 제1관 선사시대를 거쳐 들어가는 제2전시관의 이름 자체가 ‘나눌 수 없는 역사(不可分割的歷史)’다.
이데올로기의 개입이 어려운 선사시대 전시관 다음에는 바로 해당 지역이 ‘중국의 불가분 영토’임을 주장하는 역사시대관을 배치하는 게 중국 변경지역 박물관의 특징이다.
티베트박물관은 신장박물관보다 중국의 영토임을 ‘입증’하는 자료가 더 방대하다. 이곳에는 각종 문헌, 도편 자료와 함께 중국 관리의 관복, 도장, 문서 등이 망라된 300여점의 자료가 전시돼 있다. 자랑스럽게 유물을 바라보는 한족 관광객 옆에서 외국인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설명을 읽는 장면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자료의 진열 방식은 신장박물관과 비슷하다. 티베트에 대한 중국 역대왕조의 정부기관 설치와 관원 파견 사실, 판첸라마(티베트불교의 제2인자) 책봉과 관련된 사료를 집중적으로 배치해 놓고 있다. 기관의 실체 여부와 성격,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는지 여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티베트족의 토번(吐蕃)왕국도 티베트고원을 넘어 중앙아시아까지 넘본 강성한 국가였다. 7세기 송첸감포왕은 당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화해 조건으로 당나라 문성공주를 왕비로 삼기도 했다.
그러나 박물관 측은 당이 패해 문성공주를 내준 사실은 숨기고 “이때(당조)부터 티베트가 당조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원조(元朝)에 조국(중국) 판도에 들어왔다”고 주장한다.
1951년 중국의 티베트 무력 점령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간의 평화협정을 통해 얻은 평화와 자유’로 바뀌었다. 1959년 라싸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의 유혈진압과 인도로 망명한 달라이 라마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다.
우루무치·라싸=김청중 특파원
ck@segye.com
동북공정 최전선 옌볜박물관은…淸末 이후만 전시발해 유물은 全無
| ◇중국 사회주의 혁명 관련 사진이
전시된 옌볜박물관 ‘인민혁명투쟁사관’. 옌볜은 발해의 주 활동무대였지만 옌볜박물관에는 ‘해동성국’의 찬란한 유물이 한 점도 전시돼 있지
않다. |
발해의 주활동 무대였던 만주의 옌볜(延邊)박물관에서는 찬란한 ‘해동성국’의 문화 유물을 한 점도 볼 수 없다.
지린(吉林)성 옌볜조선족자치주 주도(州都)인 옌지(延吉)시 용동가의 현대식 건물에 자리를 잡은 옌볜박물관. 2001년 중국 100대 국가중점박물관에 선정된 이곳은 건축면적 3만5000㎡, 전시면적 3600㎡로 겉으로 보기엔 비교적 웅장하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전시관은 ‘인민혁명투쟁사관’과 ‘조선민속관’뿐이어서 을씨년스런 기운마저 감돈다. 전시품도 한복, 농기구, 짚신, 각종 사진류 등이어서 다소 허접스럽다.
한족인 옌볜박물관 관계자는 “옌볜박물관에서는 청나라 말 이후의 것만 전시한다”며 “조선족은 1800년대 후반에나 옌볜에 오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한반도 동북부와 만주를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인 옌볜은 발해시대에 역사의 전면에 부상했다. 대조영(大祚榮)이 나라를 세운 동모산은 옌볜주 둔화(敦化)시에 있는 성자산 산성이다.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발해의 세 도읍 가운데 중경(中京·화룽현 서고성), 동경(東京·훈춘시 팔련성)이 모두 옌볜주 관내다. 상경(上京)이 있던 헤이룽장(黑龍江)성 닝안(寧安)시 보하이진(渤海鎭)도 옌볜에서 200㎞ 거리에 있다. 그만큼 발해의 유물 유적이 산재해 있다. 발해 이전 시기의 고구려 성터도 곳곳에 남아 있다.
중국 측 자료에 따르면 옌볜박물관은 발해 관련 유물 900여점을 소장하고 있고, 이 가운데 정효공주 묘비와 벽화 등 1급 보물도 11점이나 된다. 하지만 중국 당국은 발해 유물 공개를 꺼린다. 1960년대부터 발해사를 자국 역사에 편입한 중국 당국은 조선족이 많은 옌볜의 박물관 전시목록에서 발해 유물을 의도적으로 제외한 것으로 보인다. 한·중 간 동북공정 논쟁도 중국 당국의 ‘발해 유물 감추기’에 한몫 하고 있다는 평가다.
옌볜에서 발해 연구를 한 한국인 연구자는 “발해 유물은 옌볜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돼 있는 것으로 안다”며 “외국인이 발해 유물을 보려면 성(省)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그는 “과거 고구려·발해사 연구를 주도했던 옌볜대는 동북공정 여파로 연구에서 소외됐고, 조선족 연구자들은 ‘자의 반 타의 반’ 연구를 포기하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옌지=김청중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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