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 사태 후 망명자, 무차별 발포 증언>.
아왕롭상
조회수 1,702
2008.05.03 21:52
<티베트 사태 후 망명자, 무차별 발포 증언>
viewToday('auto');연합뉴스 | 기사입력 2008.05.03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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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연합뉴스) 이홍기 특파원 = 중국 치안당국이 지난 3월 티베트 라싸에서 발생한 소요 때 군중을 향해 무차별 발포, 많은 사상자를 냈다고 시위에 가담한 뒤 망명정부가 있는 인도의 다람살라로 도피한 최초의 티베트인이 증언했다.
일본의 아사히(朝日)신문은 다람살라에서 이 티베트인을 만나 취재한 내용을 3일자 신문에 게재했다.
이 망명 티베트인은 쓰촨(四川)성의 유목민 출신으로 돈벌이를 위해 고향에 처자를 남겨두고 라싸에서 노점상을 운영하던 쿤산 소남(38)씨.
그는 시위에 참가했다가 치안당국의 무차별 발포와 친구가 총탄에 쓰러지는 것을 목겼했으며 당국의 검거 선풍이 시작되면서 신변에 위험을 느껴 지난 달 말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는 다람살라로 도피하는데 성공했다.
망명정부에 따르면 연간 2천명 정도에 달하던 티베트 난민이 중국 당국의 이동 제한 조치로 급감, 유혈사태 이후에는 소남씨와 취학 연령대의 아동 2명만이 탈출에 송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은 신문 기사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지난 3월10일 라싸 교외의 사원에서 일어난 데모에 관한 소문이 퍼졌다. 14일 오전 10시쯤 중심부에서 약 30명이 데모를 시작하자 소남씨도 시위에 참가해 "자유를, 권리를, 독립을, 달라이 라마 만세"를 외쳤다.
누군가 이슬람 교도가 운영하는 정육점에 돌을 던졌다. 티베트인이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나귀와 말고기를 판매하는 가게였기 때문이다. 정육점 주인이 칼을 들고 저항하는 바람에 소동이 커졌다.
시위 인파가 1천명 정도로 불어났을까, 여세를 몰아 치안 당국의 차를 전복시키기도 했다.
그러자 멀리서 포위를 하고 있던 경찰 병력이 발포를 시작했다. 바로 옆에 있던 친구가 가슴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천으로 감싸주면서 달아나려 했으나 2~3걸음도 떼지 못했다.
이후 혼란의 와중에서 친구의 소식을 알지 못했다. 공포보다는 분노와 증오가 밀려왔다.
데모는 장소를 바꿔 계속됐다. 한족은 자취를 감췄다. 오후 3시께 장갑차 3대가 와서 최루탄을 발사하더니 장갑차에서 병사가 자동소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곳곳으로 흩어졌다.
이어 군용 트럭들이 와서 쓰러진 사람들을 싣고 사라졌다. 화재로 인한 연기가 충만한 상황에서 두렵기도 해 사는 곳으로 돌아왔다. 저녁 9시께였다.
소남씨는 건설 노동자로 일하는, 같은 고향 출신 동료 6~7명과 함께 사원의 공터에서 텐트 생활을 하고 있었다. 3월15일 이후 병사들이 매일 찾아와 소요 당시에 무엇을 했는지, 달아난 사람은 없는지 등을 캐물었다.
노점상을 하던 동료가 연행돼 갔다. 소남씨는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입을 닫고 있었으나 데모에 참가해 투옥됐던 전력이 있어 다시 연행되면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도주를 결심했다.
행상을 위해 취득해 놓은 여권과 네팔 비자를 이용해 3월26일 네팔 국경으로 항하는 택시에 편승했다. 10개의 검문소를 거쳐 이튿날 아침 국경에 도착한 그는 국경을 오가는 상인처럼 행세하며 "폭동이 있었나요"라며 딴전을 피우며 2시간 반의 심문을 통과했다.
소남씨는 다람살라로 향하는 도중 카트만두 난민센터에서 고향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탈출 소식을 전했다. 도청의 우려가 있기 때문에 한 두 마디만 전했으며 유목을 나간 처자와는 통화를 할 수 없었다.』
lhk@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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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아사히(朝日)신문은 다람살라에서 이 티베트인을 만나 취재한 내용을 3일자 신문에 게재했다.
이 망명 티베트인은 쓰촨(四川)성의 유목민 출신으로 돈벌이를 위해 고향에 처자를 남겨두고 라싸에서 노점상을 운영하던 쿤산 소남(38)씨.
그는 시위에 참가했다가 치안당국의 무차별 발포와 친구가 총탄에 쓰러지는 것을 목겼했으며 당국의 검거 선풍이 시작되면서 신변에 위험을 느껴 지난 달 말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는 다람살라로 도피하는데 성공했다.
망명정부에 따르면 연간 2천명 정도에 달하던 티베트 난민이 중국 당국의 이동 제한 조치로 급감, 유혈사태 이후에는 소남씨와 취학 연령대의 아동 2명만이 탈출에 송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은 신문 기사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지난 3월10일 라싸 교외의 사원에서 일어난 데모에 관한 소문이 퍼졌다. 14일 오전 10시쯤 중심부에서 약 30명이 데모를 시작하자 소남씨도 시위에 참가해 "자유를, 권리를, 독립을, 달라이 라마 만세"를 외쳤다.
누군가 이슬람 교도가 운영하는 정육점에 돌을 던졌다. 티베트인이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나귀와 말고기를 판매하는 가게였기 때문이다. 정육점 주인이 칼을 들고 저항하는 바람에 소동이 커졌다.
시위 인파가 1천명 정도로 불어났을까, 여세를 몰아 치안 당국의 차를 전복시키기도 했다.
그러자 멀리서 포위를 하고 있던 경찰 병력이 발포를 시작했다. 바로 옆에 있던 친구가 가슴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천으로 감싸주면서 달아나려 했으나 2~3걸음도 떼지 못했다.
이후 혼란의 와중에서 친구의 소식을 알지 못했다. 공포보다는 분노와 증오가 밀려왔다.
데모는 장소를 바꿔 계속됐다. 한족은 자취를 감췄다. 오후 3시께 장갑차 3대가 와서 최루탄을 발사하더니 장갑차에서 병사가 자동소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곳곳으로 흩어졌다.
이어 군용 트럭들이 와서 쓰러진 사람들을 싣고 사라졌다. 화재로 인한 연기가 충만한 상황에서 두렵기도 해 사는 곳으로 돌아왔다. 저녁 9시께였다.
소남씨는 건설 노동자로 일하는, 같은 고향 출신 동료 6~7명과 함께 사원의 공터에서 텐트 생활을 하고 있었다. 3월15일 이후 병사들이 매일 찾아와 소요 당시에 무엇을 했는지, 달아난 사람은 없는지 등을 캐물었다.
노점상을 하던 동료가 연행돼 갔다. 소남씨는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입을 닫고 있었으나 데모에 참가해 투옥됐던 전력이 있어 다시 연행되면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도주를 결심했다.
행상을 위해 취득해 놓은 여권과 네팔 비자를 이용해 3월26일 네팔 국경으로 항하는 택시에 편승했다. 10개의 검문소를 거쳐 이튿날 아침 국경에 도착한 그는 국경을 오가는 상인처럼 행세하며 "폭동이 있었나요"라며 딴전을 피우며 2시간 반의 심문을 통과했다.
소남씨는 다람살라로 향하는 도중 카트만두 난민센터에서 고향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탈출 소식을 전했다. 도청의 우려가 있기 때문에 한 두 마디만 전했으며 유목을 나간 처자와는 통화를 할 수 없었다.』
lhk@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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